다들 동의 했는데 왜 나중에 딴 말을 할까? | 애빌린 패러독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합의를 거치게 된다. '합의'라 하니 몹시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별 것 아니다. 단순히 '오늘 점심 뭐 먹지?', '회식 장소로 어딜가지?' 등도 합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합의 이후는 늘 행복했을까? 뜻을 합했으니 모두가 만족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러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까는 왜 말안하고 이제 와서 그러세요?" 라는 말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종종 하게 되는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 분명히 회의도 했고 의견을 내는 것을 통해 합의도 거쳤는데 말이다.
이런 고민을 가진 이들을 위해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갈등 관리학을 가르치는 제리 하비 교수의 재밌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무더운 8월 하비 교수는 처가댁에 놀러가 쉬고 있었다. 하비 교수의 처가는 Coleman이라는 인구 5천 명의 소규모 도시였는데 저녁이 다가오자 장인이 애빌린(Abilene)으로 가서 밥을 먹자라는 제안을 했다. 하비 교수는 사막을 지나야 하고, 더운 날씨라는 조건에서 80km나 떨어진 애빌린이라는 도시까지 가는 것에 불만이 있었으나 장모가 찬성을 하고 아내 역시 애빌린에 안 가본 지 오래되었다며 찬성을 하자 그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찬성을 했다.
하지만 하비 교수의 예상대로 가는 길은 몹시 고되었으며 애빌린에서 들어간 식당의 음식은 끔찍했으며 서비스도 엉망이었다. 모두들 큰 실망을 하고 집에 와 축 쳐져 있을 때, 하비 교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오늘 저녁 괜찮지 않아?"라고 말을 했다. 다들 애빌린을 가고 싶어 했으니 자기 자신은 아니더라도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만 그들의 말은 하비 교수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 장모: 사실은 난 별로 재미없었고 처음부터 가지 않았으면 했어. 나는 다른 세명이 모두 가고 싶어 하길래 따라간다고 했을 뿐이었어.
👩🦰 아내: 난 단지 당신과, 엄마 아빠가 가자고 해서 간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반대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더운 날에 밖으로 나가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왜 했겠어?
👴 장인: 내가 보기에 모두들 지루해 보였고 너희들을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너희들을 위한 게 아니었으면 난 그냥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식을 꺼내 먹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
🤔 하비: ???
결국 4명 중 그 누구도 애빌린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시간적 비용을 들여 큰 손실을 보았다. 하비 교수는 이런 경험을 살려 ‘The Abilene Paradox: The Management of Agreement(1988)’라는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와 중에도 논문을 쓰는 당신은 대체...)
이 논문에는애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라고 불리는 현상을 정의하는데 이 부분이 몹시 흥미롭다.
애빌린 패러독스의 특징
애빌린 패러독스란 조직에서 구성원들 간의 ‘의견 일치’에 대한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증상’들이 관찰된다.
-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는 문제 해결의 과정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 구성원들은 서로 원하는 것에 대해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반대방향으로 서로에게 잘못된 인식을 주게 된다.
- 그러한 틀린 정보교환으로 인해서 그룹 구성원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단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런 경우 조직의 운영목적에 위배되는 비 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조직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를 보았을 때 조직 구성원들은 대단히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되고 조직에 대해 불만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구성원들은 의견을 같이하는 소규모의 그룹을 자연스레 만들게 되고 다른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리고 ‘비난’하게 된다. 애빌린에서 서로 책임 공방을 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 마지막 단계로 조직 구성원들이 의견 일치를 보기 위한 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문제가 더 심화되는 악순환의 사이클이 반복된다.
처음 말했던 점심 메뉴 고르기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러하다.
- 점심시간에 모두들 배가 고프다.
- 점심을 먹기 위해선 나가서 무언가를 사 먹어야 한다.
-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A가 평소에 잘 먹지 않는 '피자,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 매운 것을 먹고 싶은 직원, 밥 종류를 먹고 싶은 직원, 간단히 백반으로 때우고 싶은 직원들이 있지만, 피자나 파스타 알레르기가 있거나 못 먹는 것은 아니기에 크게 반대를 하는 이가 없다. 그리곤 피자, 파스타를 먹으러 간다.
-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니 가격도 상당히 나오고 다들 만족도가 높지도 않다.
- 먹고 나오는 길에 볼멘소리가 나온다. 그리고는 서로 마음이 상한다.
- 이후 A 역시 제안을 하는데 소극적이게 되고 다른 이들 역시 의견을 내지 않는다.
이는 점심식사를 예로 간단히 들어본 예이다. 물론, 간단한 메뉴를 정하는 것이야 다양한 해결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실제 업무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매우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애빌린 패러독스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비 교수는 해당 논문에서 크게 다섯 가지 이유로 인해 애빌린 패러독스가 발생한다고 정리하였다.
행동 불안성(Action Anxiety)
개인이 실제 원하는 행동을 취하게 될 경우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실 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게 될 수 있다.
부정적 공상(Negative Fantasies)
본인이 원하는 것을 했을 경우 상황이 정말 나아질까 하는데 대한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결과에 대한 회의감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위험(Real Risk)
실제 원하는 행동에 수반되는 위험 혹은 불확실성이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게 된다.
분리의 공포(Fear of Separation)
그룹 구성원들과의 우정, 친분관계를 깨뜨리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지 않으려 하게 된다.
심리적 위험과 확신의 반전(Psychological Reversal of Risk and Certainty)
본인이 원하는 대안이 선택되었을 때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소원하게 되는 심리적 불안감이 우리 사고체계를 바꾸어서 마치 우리 자신이 그 반대의 대안이 옳은 선택이라고 잘못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 원인은 알았는데 이걸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렇다. 이런 문제가 있다쯤은 대부분 자각을 못할 뿐이지 듣고 나면 '맞아, 이런 경향이 있지' 한다. 하비 교수는 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에 애빌린 패러독스를 피하는 방법을 두 가지 제안한다.
희생양 없애기(Don't make victim)
희생양을 찾지 말아야 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흔히 누군가 혹은 단체, 사회에게 책임을 지우고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담합하지 않기(Don't be in cahoots)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담합’을 하지 않으면 된다. 모두가 묵시적으로 담합하지 않았다면 Abilene로 자동차를 몰고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애빌린 패러독스는 독자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모두가 YES 할 때(하는 것처럼 보일 때), 당당히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애빌린 패러독스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조직은 동료들 간 직장 상사 혹은 부하직원들과의 사이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담합’이 쉽게 이루어지는 조직이다. '내가 의견을 내면 이 일은 내가 떠맡게 될 거야', '다들 말이 없는 걸 보니 동의하는 것 같으니 난 조용히 있어야지' 같은 생각은 결국 조직을 좀 먹게 된다.
하비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애빌린 패러독스는 결국 본인이 조직 구성원의 일원으로 구성원들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누면서 추진하게 된 것임으로 언젠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렇게 불만이 생기면 조직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해하지 못하고, 개인 역시 이것으로 인해 심리적인 안도감을 얻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조직 구성원 전부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업무를 진행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가 불만족하거나 어중간한 결과가 나오는 것만큼 낭비인 것도 없다. 구성원을 설득시키고 이해하는 과정이 시간이 걸리고 귀찮을 지라도 생각의 차이를 메꾸는 것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세 줄 요약
- 남탓 하지말자. 균열을 발생시킨다.
- 담합하지 말자. 누군가는 고립된다.
-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아도 아닐 수 있다.
- 모두가 동의를 하는 것인지 그냥 어림짐작으로 따르는지 파악하자
-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안/못 내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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